감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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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관하여
서론
작년과 올해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사람과 헤어지기도 했고 사람과 만나기도 했다. 기회를 놓쳐 눈물을 흘리기도, 기회를 잡아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언제나 태풍의 눈이고 싶었던 나는 오히려 태풍에 휩쓸린 발치쯤 되어 어딘가에서 뒹굴다 넝마가 되어버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한없이 긴 졸업 후 2년이라는 시간이 이제 커튼콜을 앞두고 있다. 유명한 업계 선배들은 ‘회고’라는 멋진 말로 커튼콜 인사를 관객에게 보내곤 한다. 이번에는 나도 감정에 대한 짧은 단상을 적으며,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구석에서 과거의 나에게 작은 인사를 보내보려 한다.
감정과 나
오래전부터 감정은 혼란스럽고 두려운 기억이었다. 강한 통제 강박을 물려받은 탓인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정말 싫어했다. 감정은 그런 부류였다. 물건이 혼란스럽게 놓여 있다면 단지 잘 정리하거나 내가 원하는 위치에 갖다 두면 된다. 사람과의 관계가 혼란스러우면 그보다 약간 어렵지만, 그냥 멀찍이 떨어져 타인이 되면 훨씬 가벼워진다. 그런데 심장 속에 휘몰아치는 감정들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어리고 유약한 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감정 자체보다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날 휘감는 감각이 더욱 싫었다. 어쩌면 정신적으로 빨리 성장하고 싶어했고 애늙은이라는 칭찬에 뿌듯했던 이유는, 내가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일테다.
돌이켜 회상하면 이상심리학 교재의 흔하디흔한 이야기처럼, 감정에 대한 오랜 외면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그저 팔자 좋게 ‘내가 이렇게 기뻐요’나 ‘내가 이렇게 슬퍼요’ 따위의 호소를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 시절이 그랬고, 그 시절을 빚어낸 빗금들이 그랬듯이 내 감정을 돌봐줄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사람도 없었다. 바쁘다기보다 처절하게 살아가는 가족들을 보며, 비탈길을 굴러 내려오는 감정이라는 눈덩이를 혼자 감당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당장 죽자 살자 하는 사람들에게 외롭다, 심심하다, 무섭다 따위의 말은 닿지 않을 테니.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외면이었다. 억압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무엇인지 애써 잊어버리고, 무섭도록 솟구치는 노르에피네프린과 엔돌핀을 눈앞에 놓인 장난감과 책, 컴퓨터 화면으로 덮어버렸다. 누군가는 내가 혼자 잘 놀고 의젓하게 커간다고 부러워했지만,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어둠을 피해 앞으로 달려나가는 어린아이는 아니었을까. 전공으로 굳이 심리학을 선택한 이유도 이런 내 결핍에서 시작되었던 것일까 생각해본다. 매 순간 느끼고 함께하지만 그걸 다루는 법은 누구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충분히 말라 단단해진 열아홉이라면 그걸 배워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본능적으로 이끌렸던 것 같다.
이름 붙이기
어떤 괴물들은 이름을 붙여야 비로소 무서워진다. 정확히 하자면 세분화할수록 공포가 그 색을 갖는다. 귀신이라는 개념만으로는 그리 무섭지 않다. 그렇지만 지박령, 처녀귀신, 팔척귀신을 넘어 광대귀신, 빨간 마스크, 그들이 나올 법한 흉가까지 가면 공포의 면목이 비로소 선명해지는 법이다. 감정도 그런 것 같다. 심장이 뛰고 동공이 커지며 손발에 땀이 나는 것만으로는 그 감정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 두려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그 모든 증상이 합쳐져 fight or flight 버튼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일기와 회고를 쓰며 감정에 대해 서술하기 시작하면 감당하기 어려워지곤 했다. 기억 자체가 혼란스럽고 어떻게 글에 담아야 할지 몰라 어렵기도 했지만, 회상과 함께 그 감정에 이름표를 붙이면 도리어 마땅히 느껴지는 그것들이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것이 두려움이든, 기쁨이든, 심지어 사랑이든 마치 인스턴트 식품처럼 간편하게 즐기고 잊어버리길 반복했다.
기억
정신분석학을 배울 때 억압된 기억들이 단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쌓여 있다고 들었다. 아픈 일들을 애써 기억에서 말소한 뒤 웃어 보였던 나는 솔직히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히려 자리를 잡아가는 지금, 비로소 불안에서 멀리 도망쳐 왔다고 생각한 지금에 와서야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막을 수 없이 떠오르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단순히 시험 성적을 잊어버리듯 감정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망각의 늪에 던져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늪이 점점 불어나 이젠 둑을 넘어오는 물살이 되어버린 듯하다. 바쁘고 불안할 때, 아침 햇살을 맞으며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걸어갈 때면 블로그와 SNS에 징징대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너무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할 일이 없으니, 간절한 게 없으니 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그런데 정작 내가 그들의 상황이 되자 여지없이 징징대는 나약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하루고 이틀이고 천장을 바라보다 보면 그 기억들에 푹 빠져 길을 잃고는 한다. 어느 날은 꼬박 한나절을 부족했던 어린 시절과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는 지금을 관조하며, 더 나아가 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뉘우친 적도 있었다.
페르소나
얼마 전 이동진 평론가가 아비투스에 대해 설명하는 쇼츠를 보았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 취미, 취향도 달라진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이 어색해하고 소탈해보이는 것도 부자의 취미보다 가난한 자의 취미를 어린 시절 즐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비투스는 조금은 슬픈 이야기지만 그래도 건조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어느 정도 자본이라는 것에 천한 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취향에 대해 우열을 가릴 필요를 딱히 느끼지 않으니, 캐비어를 불편해하고 국밥을 즐기는걸 딱히 우습게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감정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풍부한 감정의 호수에서 자라온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들이 편안하게 쓰는 가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후자일수록 솔직하지 못하다거나 애어른 같다는 느낌을 주는 듯한데, 아마 자신의 감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불편함을 주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밝고 솔직한 전자의 부류를 선망하곤 한다.
결론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 지 난감한 글이 있다. 일기가 그런 종류가 아닐까 한다. 마음껏 휘갈기고나면 휙 구겨서 다시는 처다보지도 않고 어디 구석에 처박아 놓는 그런 종류의 글. 이번 포스트도 그런 글이다. 마무리 몇 줄을 쓰지 못해 몇 달을 써야지, 써야지, 언젠가 써야지 타령을 했던 글이다.
결론이 없는 글이 그렇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뭘 하라고?‘라는 질문이 머리 한 구석에서 떠나지 않는 글은 결론을 뒤편으로 밀어내는 법인가보다.